이한영이 살았던 조선말부터 근대 초 개화기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시절이었고,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동안 문화 환경은 황폐해졌지만, 다산(茶山), 추사(秋史), 초의(草衣) 등이 부흥시켰던 한국 차문화의 맥은 차산지 주민들과 사원들에 의해 약하게 이어졌다. 반면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차산지와 차문화를 조사 연구하였고, 기업화된 다원을 조성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와타나베 아키라(渡邊彰)는 1920년 「조선의 다업에 관하여(朝鮮の茶業 に就いて)」라는 논문에서 조선의 차진흥 목적과 구현방안을 밝혔다. 『조선의 차와 선 (朝鮮の茶と禪)』의 序文에서 외무대신 우가키 가즈나리(宇垣一成)는 ‘중일쟁이후 중국의 차와 소련의 비행기가 교환되는 사실을 인지시키며, 조선차를 개발하여 다업국책(茶業 國策)의 열매 맺자’고 하고, 상공대신 후지와라 긴지로우(藤原飮次郞)는 ‘조선에 양종(良種)의 자생차를 재배하면 산업진흥에 크게 이바지 할 것이라며, 조선차를 개발하여 직접 세계 녹차 수요국에 수출하여야 할 것이다’며 우리 차에 대한 관심을 밝혔다.
오자키 이치조(尾崎市三)의 광주 무등다원, 오가와(小川)의 정읍 오가와다원, 경성화학공업(주)의 보성 보성다원 등은 일본인에 이한 기업화된 다원이었다. 이외에도 고흥군 고흥면에는 시즈오카현의 차종자를, 영암군 삼호면에는 에이메히현으로부터 차 묘목을, 나주군 금천면 원곡리, 남평면 남평리, 영산면 삼정리, 영산리, 동수리에 시즈오카현, 구마모도현, 교토로부터 차묘목을 들여와 심었다. 제주도 서흥리에도 차종자를 들여와 이식하였다. 그 외에도 구례군 마산면의 차는 1932년부터 우지차 제다법으로 제다되었다.
이렇듯 우리나라 차문화와 산업은 하나 둘 일본에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이한영은 전부터 만들어오던 금릉월산차 상표인을 분실하게 되고, 새로이 ‘백운옥판차’를 만들게 되었다. 백운옥판차는 금릉월산차 상표인에 진일보 하여 꽃문양을 추가한다. 꽃문양과 그 화제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꽃문양은 한반도의 형상을 하고 있다. 화제 “백운일지 강남춘신(白雲一枝 江南春信)”은 백운동 한자락 나뭇가지에 날아든 강남의 봄소식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이한영이 기다린 봄소식은 무엇을 뜻했을까를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출처: 『朝鮮の茶と禪』(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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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옥판차가 만들어진 1920년대는 일제의 경제적 수탈정책에 맞서 범국민적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인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이 전개된 시기였다. 또한 이한영이 수학한 집안의 족숙 이흠(李欽, 1842-1928)은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조직된 자신회(自新會) 회원들과 깊은 교유를 맺었다. 이흠과 교유한 인물은 다양하지만 집안에 소장되어있는 수신 간찰을 통해보자면 특히 진도유배지에서 보내온 편지가 많다. 이들은 바로 자신회 인물들이었는데, 대부분 그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인물들이기도 하였다.


이한영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흠의 글
이흠의 일기에 의하면, 1907년 2월 18일에 경의문대 회시를 보러 서울에 있을 때 바로 눈앞에서 윤주찬이 잡혀갔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자신회 사람들의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있었고, 관련자들이 모두 투옥되었다. 자신회 회원들은 대부분 전라도 출신으로 이흠과도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었는데, 6월에 대부분 진도로 유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흠은 6월에 이들을 찾아갔다. 이흠의 문집에 「윤일사가 옥주(진도)에서 중양일에 정무정의 농장에서 지었던 고체시를 따라 차운하다(追和尹一史沃州重陽日鄭茂亭 庄上古體)」란 시가 들어 있는데, 이 시에 참여한 사람은 정만조, 정인국, 최익진崔翼軫(1860~?), 이광수, 윤충하尹忠夏, 오기호吳基鎬(1863~1916), 윤주찬 등이었다.
이흠의 일기와 편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윤주찬이다. 윤주찬은 사돈집안 사람인데다 각별한 사이였고, 서울에서 주사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흠이 가장 많이 의지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서울소식은 윤주찬을 통해 알 수 있었고, 서울에 있을 때도 윤주찬을 통해 움직일 수 있었다. 이흠이 누구에게서 수학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았지만, 훗날 자이당(自怡堂) 문집을 편찬한 것으로 보아 집안 족숙인 자이당 이시헌(李時憲, 1803-1860)에게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흠의 후손가에는 이시헌의 간찰첩 3종이 전사본으로 남아있고, 정약용이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를 전사해 놓은 간찰첩 「탁옹서독籜翁書牘」도 남아있다.
이한영은 이흠에게 수학하였으니, 다산의 가르침은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산의 제다지식 뿐 아니라 정신적 유산은 대를 이어 계승되었고 이러한 것이 밑거름이 되어 백운옥판차가 탄생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한영이 살았던 조선말부터 근대 초 개화기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시절이었고,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동안 문화 환경은 황폐해졌지만, 다산(茶山), 추사(秋史), 초의(草衣) 등이 부흥시켰던 한국 차문화의 맥은 차산지 주민들과 사원들에 의해 약하게 이어졌다. 반면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차산지와 차문화를 조사 연구하였고, 기업화된 다원을 조성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와타나베 아키라(渡邊彰)는 1920년 「조선의 다업에 관하여(朝鮮の茶業 に就いて)」라는 논문에서 조선의 차진흥 목적과 구현방안을 밝혔다. 『조선의 차와 선 (朝鮮の茶と禪)』의 序文에서 외무대신 우가키 가즈나리(宇垣一成)는 ‘중일쟁이후 중국의 차와 소련의 비행기가 교환되는 사실을 인지시키며, 조선차를 개발하여 다업국책(茶業 國策)의 열매 맺자’고 하고, 상공대신 후지와라 긴지로우(藤原飮次郞)는 ‘조선에 양종(良種)의 자생차를 재배하면 산업진흥에 크게 이바지 할 것이라며, 조선차를 개발하여 직접 세계 녹차 수요국에 수출하여야 할 것이다’며 우리 차에 대한 관심을 밝혔다.
오자키 이치조(尾崎市三)의 광주 무등다원, 오가와(小川)의 정읍 오가와다원, 경성화학공업(주)의 보성 보성다원 등은 일본인에 이한 기업화된 다원이었다. 이외에도 고흥군 고흥면에는 시즈오카현의 차종자를, 영암군 삼호면에는 에이메히현으로부터 차 묘목을, 나주군 금천면 원곡리, 남평면 남평리, 영산면 삼정리, 영산리, 동수리에 시즈오카현, 구마모도현, 교토로부터 차묘목을 들여와 심었다. 제주도 서흥리에도 차종자를 들여와 이식하였다. 그 외에도 구례군 마산면의 차는 1932년부터 우지차 제다법으로 제다되었다.
이렇듯 우리나라 차문화와 산업은 하나 둘 일본에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이한영은 전부터 만들어오던 금릉월산차 상표인을 분실하게 되고, 새로이 ‘백운옥판차’를 만들게 되었다. 백운옥판차는 금릉월산차 상표인에 진일보 하여 꽃문양을 추가한다. 꽃문양과 그 화제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꽃문양은 한반도의 형상을 하고 있다. 화제 “백운일지 강남춘신(白雲一枝 江南春信)”은 백운동 한자락 나뭇가지에 날아든 강남의 봄소식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이한영이 기다린 봄소식은 무엇을 뜻했을까를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출처: 『朝鮮の茶と禪』(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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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옥판차가 만들어진 1920년대는 일제의 경제적 수탈정책에 맞서 범국민적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인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이 전개된 시기였다. 또한 이한영이 수학한 집안의 족숙 이흠(李欽, 1842-1928)은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조직된 자신회(自新會) 회원들과 깊은 교유를 맺었다. 이흠과 교유한 인물은 다양하지만 집안에 소장되어있는 수신 간찰을 통해보자면 특히 진도유배지에서 보내온 편지가 많다. 이들은 바로 자신회 인물들이었는데, 대부분 그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인물들이기도 하였다.
이한영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흠의 글
이흠의 일기에 의하면, 1907년 2월 18일에 경의문대 회시를 보러 서울에 있을 때 바로 눈앞에서 윤주찬이 잡혀갔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자신회 사람들의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있었고, 관련자들이 모두 투옥되었다. 자신회 회원들은 대부분 전라도 출신으로 이흠과도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었는데, 6월에 대부분 진도로 유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흠은 6월에 이들을 찾아갔다. 이흠의 문집에 「윤일사가 옥주(진도)에서 중양일에 정무정의 농장에서 지었던 고체시를 따라 차운하다(追和尹一史沃州重陽日鄭茂亭 庄上古體)」란 시가 들어 있는데, 이 시에 참여한 사람은 정만조, 정인국, 최익진崔翼軫(1860~?), 이광수, 윤충하尹忠夏, 오기호吳基鎬(1863~1916), 윤주찬 등이었다.
이흠의 일기와 편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윤주찬이다. 윤주찬은 사돈집안 사람인데다 각별한 사이였고, 서울에서 주사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흠이 가장 많이 의지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서울소식은 윤주찬을 통해 알 수 있었고, 서울에 있을 때도 윤주찬을 통해 움직일 수 있었다. 이흠이 누구에게서 수학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았지만, 훗날 자이당(自怡堂) 문집을 편찬한 것으로 보아 집안 족숙인 자이당 이시헌(李時憲, 1803-1860)에게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흠의 후손가에는 이시헌의 간찰첩 3종이 전사본으로 남아있고, 정약용이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를 전사해 놓은 간찰첩 「탁옹서독籜翁書牘」도 남아있다.
이한영은 이흠에게 수학하였으니, 다산의 가르침은 대를 이어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산의 제다지식 뿐 아니라 정신적 유산은 대를 이어 계승되었고 이러한 것이 밑거름이 되어 백운옥판차가 탄생한 것으로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