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제다지식의 세대적 계승



  다신계의 약속은 100년 이상 지켜졌다. 일본 학자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은 다산의 현손 정규영(丁奎英, 1872-1927)에게 금릉월산차를 대접받은 일을 「차이야기(茶の話)」에 기록하였다.


 나는 몇 해 전 다산 정약용의 저서를 조사하기 위해서, 그의 현손에 해당하는 규영씨가 있는 경기도 양근 마현리를 방문하였다. 정약용의 별호 다산은 사실 전남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던 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서, 지금도 강진 다산의 마을 사람이 다산선생의 유덕을 경모해서 매년 이른 봄에는 선생 유법의 차를 보내온다고 하며 보여준 것은 세로 5촌(15cm), 가로 2촌(6cm) 정도의 종이봉투 표면에 붉은색으로「금릉월산차」라고 찍혀있는 봉투에 넣어져 있었다. 이것을 열어 점검해보니 싹은 굵고 길어 1촌(3cm) 정도가 되는 자못 훌륭한 것으로서, 시험 삼아 그것을 달여서 맛보았더니, 차의 향기 등은 거의 없고, 달지도 쓰지도 떫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차가 아닌 산차(동백)의 어린 싹(嫩芽)으로 만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유카이 후사노신이 다산의 현손(玄孫) 정규영(奎英)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금릉월산차(金陵月山茶)’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다. 정규영의 생몰연대로 미루어보아 아유카이 후사노신이 여유당을 방문한 것은 1920년대 초반으로, 묵혀두었던 기록을 1931년에 발표한 것이다. 정규영은 금릉월산차가 강진의 다산에서 다산선생의 유덕(遺德)을 경모하여 매년 이른 봄에 강진에서 보내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금릉은 강진의 옛 지명이고 월산은 월출산을 말한다. 강진 월출산의 차가 다신계 약속을 100년 이상 지켜오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범해의 말대로 월출산에서 난 차는 신의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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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릉월산차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다산의 제다법으로 만들어졌다. 둘째, 세로5촌(15cm), 가로2촌(6cm)크기의 포장지에 포장되었다. 셋째, 금릉월산차라는 상표인이 붉은색으로 찍혀있었다. 넷째, 1창으로 만들어진 차였다. 다산이 잎차 제다법이 전승되어 금릉월산차로 태어난 것이다. 금릉월산차를 만든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이로부터 10여 년 뒤 1940년에 출판된 『朝鮮の茶と禪』을 통해 금릉월산차 제조자가 바로 이한영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시헌이 지인에게 쓴 글 중에 “월출산에서 나는 작설차 한 갑과 황초 두 자루를 부칩니다.(月山所産雀舌茶一匣, 黃燭二柄付 )”라는 글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시헌의 아들 이면흠의 편지에는 “향명 8갑을 삼가드리오니, 정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香茗八匣伏呈, 領情伏望耳)”라는 대목이 있다. ‘갑(匣)’이라는 잎차 포장 단위는 이시헌 대부터 사용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를 이한영이 창의적으로 계승하여 규격화된 포장법을 개발하고 상표인을 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