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옥판차는 집안에 전승된 것 이외에 차계의 거장들에게도 제다법이 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석환은 2003년 수산스님을 방문하여 함께 차를 만들며 인터뷰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수산스님은 1922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1940년 백양사로 출가하여 1941년 만암스님의 휘하에서 다각승으로 선을 닦았다. 그 무렵에 체득한 선다 정신과 강진 월남사에서 만들던 이한영 선생의 백운옥판차 제조기술을 터득하여 옛 방법대로 차를 만들어왔다. 수산스님은 학명 - 만암 스님 등으로 이어지는 백양사 다선의 맥을 이어왔고, 민간에 전승되어 온 백운옥판차의 제다법을 배워온 후 선종차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수산스님이 차를 만들게 된 것은 잔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뚜렷이 차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있는 이한영(李漢永)선생을 찾아가 제다법을 배워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이한영은 백운옥판차를 만들고 있었다.
다음은 2007년에 백양사를 방문하여 당시 조계종 백양사 문중의 방장이셨던 수산스님에게 떡차 제다법을 배운 김대호 박사의 증언이다. 스님은 차를 다섯 가지 약초와 함께 절구질해서 나무나 옥으로 만든 떡살로 찍어낸다고 하였는데, 강진 성전 월출산 옥판봉 아래 이한영이라는 분을 찾아가서, 이한영과 자부에게 떡차(돈차)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고 증언하였다.
이경희는 「한국 민간제다 전승현황 연구」에서 백운옥판차와 반야로차의 중요한 공정 세 가지가 동일하다고 밝혔다. 첫째, 반야로차의 찻잎을 데치는 공정과 백운옥판차의 불을 땐 가마솥에 넣고 살짝 데치는 공정이 동일하며, 둘째, 반야로차 제조에서 데쳐진 찻잎의 물기가 어느 정도 제거되면 덖는 공정과 백운옥판차의 세 번 정도 덖는 공정이 동일하고, 셋째, 반야로차 제조공정 중 찻잎을 무명보자기에 싼 뒤 솥에 나뭇가지를 걸치고 살짝 찐다는 공정과 백운옥판차의 차를 덖을 뒤 시루에서 쪄서 비비기도 했다는 점이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경상남도 사천시(泗川시) 곤명면 용산리 이명산 기슭에 있는 다솔사의 주지였던 효당과 전라남도 강진군 월출산 아래 월남마을에 살았던 이한영의 접점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한 장의 사진이 남아있다. 1932년 효당은 월남사지3층석탑을 방문하여 사진을 남겼다. 탑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이한영의 형인 일영, 서쪽에는 동생 연영, 남쪽에는 이한영이 살았다. 탑을 중심으로 담 없이 세 형제가 집을 짓고 살았으니 탑은 이들 3형제의 마당에 위치해 있는 격이다. 탑에 왔으니 당연히 집주인을 만나고 갔을 테고, 일찍 작고한 형을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었던 이한영을 효당이 만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효당은 전국을 돌며 독립자금을 마련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이한영의 백운옥판차는 제다법의 전승 뿐 아니라 한국 차산업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에이리가 1939년 장흥 유재의로부터 백운옥판차를 처음 소개받았던 장면을 『朝鮮の茶と禪』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차를 마시고 작별을 하려고 하는데, 유씨(劉氏)가 진귀한 차가 있다 하면서 한 봉지의 차를 장롱 속에서 내 보여주셨다. 그것은 녹자판(綠字板)으로 표면에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차의 꽃을 흉내 낸 장방형(長方形)의 포(包)였다. 지포(紙包)의 두께는 세 푼, 길이 15cm, 폭 9.9 정도이고 총무게는 56.25g이다. 포 가운데는 대나무로 틀을 짜서 포의 형을 유지했다. 이것은 성전면 수양리 사람이 작년에 팔러 와서 한 포에 10전을 주고 산 것이다. 차 만드는 법은 자세히 알지 못하나 작설차에 속하는 것으로 상등(上等)이다. 재미있는 것을 본 것이다. 이 차를 팔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이 차를 만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을 조사하면 더 재미있는 것을 알 것이다.
이한영의 손자 이관묵은 “5월이 되면 청명한 날, 백운동 일대에서 따낸 찻잎을 팔러오는 사람들에게서 찻잎을 사들였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백운옥판차 생산조직은 찻잎을 따는 사람, 차를 제조하는 사람, 완성된 차를 포장하여 제품화하는 사람, 포장된 차를 판매하는 사람 등으로 역할이 분담된 공동생산조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신계는 다원의 관리와 제다방법의 표준화를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 차산업의 태동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산이 떠난 뒤 강진에서는 차의 생산과 판매가 분리되면서 근대적 개념의 차산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백운옥판차 생산조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백운옥판차는 최초의 상업화된 차 상표일 뿐 아니라 다신계의 정신을 계승한 민족자본을 토대로 한 근대의 자주적 협동조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백운옥판차는 집안에 전승된 것 이외에 차계의 거장들에게도 제다법이 전승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석환은 2003년 수산스님을 방문하여 함께 차를 만들며 인터뷰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수산스님은 1922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1940년 백양사로 출가하여 1941년 만암스님의 휘하에서 다각승으로 선을 닦았다. 그 무렵에 체득한 선다 정신과 강진 월남사에서 만들던 이한영 선생의 백운옥판차 제조기술을 터득하여 옛 방법대로 차를 만들어왔다. 수산스님은 학명 - 만암 스님 등으로 이어지는 백양사 다선의 맥을 이어왔고, 민간에 전승되어 온 백운옥판차의 제다법을 배워온 후 선종차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수산스님이 차를 만들게 된 것은 잔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뚜렷이 차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에 있는 이한영(李漢永)선생을 찾아가 제다법을 배워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이한영은 백운옥판차를 만들고 있었다.
다음은 2007년에 백양사를 방문하여 당시 조계종 백양사 문중의 방장이셨던 수산스님에게 떡차 제다법을 배운 김대호 박사의 증언이다. 스님은 차를 다섯 가지 약초와 함께 절구질해서 나무나 옥으로 만든 떡살로 찍어낸다고 하였는데, 강진 성전 월출산 옥판봉 아래 이한영이라는 분을 찾아가서, 이한영과 자부에게 떡차(돈차)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고 증언하였다.
이경희는 「한국 민간제다 전승현황 연구」에서 백운옥판차와 반야로차의 중요한 공정 세 가지가 동일하다고 밝혔다. 첫째, 반야로차의 찻잎을 데치는 공정과 백운옥판차의 불을 땐 가마솥에 넣고 살짝 데치는 공정이 동일하며, 둘째, 반야로차 제조에서 데쳐진 찻잎의 물기가 어느 정도 제거되면 덖는 공정과 백운옥판차의 세 번 정도 덖는 공정이 동일하고, 셋째, 반야로차 제조공정 중 찻잎을 무명보자기에 싼 뒤 솥에 나뭇가지를 걸치고 살짝 찐다는 공정과 백운옥판차의 차를 덖을 뒤 시루에서 쪄서 비비기도 했다는 점이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경상남도 사천시(泗川시) 곤명면 용산리 이명산 기슭에 있는 다솔사의 주지였던 효당과 전라남도 강진군 월출산 아래 월남마을에 살았던 이한영의 접점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한 장의 사진이 남아있다. 1932년 효당은 월남사지3층석탑을 방문하여 사진을 남겼다. 탑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이한영의 형인 일영, 서쪽에는 동생 연영, 남쪽에는 이한영이 살았다. 탑을 중심으로 담 없이 세 형제가 집을 짓고 살았으니 탑은 이들 3형제의 마당에 위치해 있는 격이다. 탑에 왔으니 당연히 집주인을 만나고 갔을 테고, 일찍 작고한 형을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었던 이한영을 효당이 만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효당은 전국을 돌며 독립자금을 마련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이한영의 백운옥판차는 제다법의 전승 뿐 아니라 한국 차산업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에이리가 1939년 장흥 유재의로부터 백운옥판차를 처음 소개받았던 장면을 『朝鮮の茶と禪』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한영의 손자 이관묵은 “5월이 되면 청명한 날, 백운동 일대에서 따낸 찻잎을 팔러오는 사람들에게서 찻잎을 사들였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백운옥판차 생산조직은 찻잎을 따는 사람, 차를 제조하는 사람, 완성된 차를 포장하여 제품화하는 사람, 포장된 차를 판매하는 사람 등으로 역할이 분담된 공동생산조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신계는 다원의 관리와 제다방법의 표준화를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 차산업의 태동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다산이 떠난 뒤 강진에서는 차의 생산과 판매가 분리되면서 근대적 개념의 차산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백운옥판차 생산조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백운옥판차는 최초의 상업화된 차 상표일 뿐 아니라 다신계의 정신을 계승한 민족자본을 토대로 한 근대의 자주적 협동조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